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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수필 사이

호박 고구마

밝은 창 2011. 12. 13. 19:41


 

호박과 고구마가 만났다.

사실 정확한 표현은

만난 것이 확실하다고 해야 한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땅 속과 위를 오가며 만났을 텐데도

한 번도 들킨 적이 없다.

늘 저공비행하는 잠자리도 몰랐고,

어둠속 세상을 훤히 보는 부엉이도 몰랐으며,

심지어는 

땅속의 파수군인 지렁이도 몰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는지

그야말로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아마 초특급 비밀 작전을 펼쳤나 보다.


그런데 아뿔싸 이를 어쩌나.

만나는 것은 비밀로 잘 했는데,

피임에는 제대로 신경을 쓰지 못한 모양이다.

고구마가 덜커덕 임신을 하는 바람에

둘의 사랑행각이 드러나 버렸다.


평생토록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예쁜 사랑을 이어가자고 굳게 약속했는데

사소한 부주의로

그만 들통이 나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땅속에서 태어나고 땅의 기운으로 자라서

겉모습은 고구마를 닮았지만,

속살엔 호박의 유전자가 섞여있는

새로운 존재가 태어났다.


고구마 껍질 속의

진노랑 색 촉촉한 속살과 호박 닮은 단맛.

누가 봐도 틀림없는

호박과 고구마의 사랑의 결실이다.


하지만 둘의 입장은 난처해졌다.

호박은 호박대로

고구마는 고구마대로

자기 동료들에게 손가락질을 받아야 했다.

모두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수근 댔다.


사정을 모르는 잠자리나 부엉이 등이

축하의 인사를 건네면,

호박은 먼 산 바라보며 헛기침만 하고

고구마는 자꾸 땅속으로 도망갔다.


어쨌든 대단하다.

도무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종족끼리의 사랑을 이루어낸 그들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이 둘 사이의 사랑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리라.


그런데 

둘의 사정이야 어떠하든

다른 이들은 짜릿했을 그 사랑이 부럽고,

그것의 결실 또한 너무 예쁜 모양이다.


쌔근쌔근 누워 잠자는

애기 호박고구마를

낮엔 잠자리가 부러워 자꾸 쓰다듬어 보고

밤엔 부엉이가 자주 찾아와 눈을 깜박이며 쳐다본다.

 

그들의 시샘 속에

조용히

겨울이 깊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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